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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의 공동체를 위하여 - 영화 "런던 프라이드"

문화로 보는 마을인문학 / 긍지의 공동체를 위하여 - 영화 <런던 프라이드>


 
1984년, 영국. 대규모 탄광 폐쇄정책과 이에 항의하는 노조원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고자 했던 성소수자들의 연대를 그린 영화 <런던 프라이드>
▲ 1984년, 영국. 대규모 탄광 폐쇄정책과 이에 항의하는 노조원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하고자 했던 성소수자들의 연대를 그린 영화 <런던 프라이드>.
 



조직과 공동체는 다르다. 조직은 내부의 이질적인 것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순수한 집단이라는 환상’을 공유한다. 일부러 따옴표로 강조 표시를 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신기루임을 분명히 해두고 싶어서다. 게다가 이런 인식은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다. 역사에서 배운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별 게 아니다. 순일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헛된 야망이 인류의 비극을 초래했다. 반면 공동체는 내부의 이질적인 것을 용인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더 정확히 말해 공동체는 ‘이질적인 것 자체가 부분집합으로 모인, (공집합을 포함하는) 전체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따옴표로 강조 표시를 했다. 조직이 아닌 공동체의 명제가 우리 사회에 더 많이 확산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매튜 워처스 감독의 영화 <런던 프라이드>는 그런 역할을 할 만하다. 이 작품은 1984년 영국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시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는 대규모 탄광 폐쇄 정책을 공표한다. 석탄산업 구조조정 방안으로 시행된 일방적 결정이었다. 당연히 광부 노조는 반발했다. 그들은 파업에 돌입했고 투쟁은 장기간 이어졌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당국의 탄압 외에도 대중의 무관심과 경제적 궁핍이 광부 노조를 괴롭혔다. 그때 한 단체가 이들을 돕기로 나선다. 단체의 명칭은 LGSM(Lesbian and Gay Support Miners), 광부를 지지하는 동성애자 모임이다. LGSM은 런던에서 모금 운동을 통해 모은 돈을 광부 노조에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나 LGSM의 입장에서는 후원금을 받으려는 광부 노조를 찾기가 후원금 마련보다 훨씬 어려웠다. 후원금을 내려는 단체가 동성애자 모임임을 밝히는 순간, 광부 노조 전화는 끊어져버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LGSM은 여기저기 연락을 취한다. 그러다 마침내 후원금을 감사히 받겠다고 답변한 사람과의 통화에 성공한다. 그는 웨일스 탄광 노조의 일원이었다. LGSM 멤버들은 환호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랬다. 귀가 어두웠던 웨일스 탄광 노조 담당자가 LGSM의 정체를 런던 어쩌고저쩌고 하는 단체로 오해한 것이다. 웨일스 광부 대표로 런던을 방문한 다이(패디 콘시딘)도 이곳에 와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야 착오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LGSM의 L이 런던이 아니라 레즈비언의 약자였다니! 그는 당황한다.

그렇지만 다이는 LGSM의 지원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의 통념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다이는 게이바에서 이렇게 감사를 표한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돈 이상의 것을 주었습니다. 바로 우정이지요. 당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난 상황에서, 있는 줄도 몰랐던 지원군을 만난다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 겁니다.” 그가 말한 우정을 연대로 바꿔도 될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편하게 결속하는 연대 같은 건 없다는 진실 말이다. 같은 것이 아니면 단절하려는 배척의 태도를 넘어, 불균일한 것이 섞이는 혼란의 시기를 거친 후에야, 연대가 성립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생겨난다. 이 과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연대는 깨질 수도 있고, 혹은 단단해질 수도 있다.




 
 광산노조의 소식을 접한 게이 레즈비언 친구들이 그들을 돕기로 결정한다
웨일즈의 광산노조의 다이는 이 단체(?)의 정체를 모른 채 후원을 받아들이게 되고, 나중에는 진정한 결속과 연대의 악수를 청한다

▲ 광산노조의 소식을 접한 게이 레즈비언 친구들이 그들을 돕기로 결정한다(위). 웨일즈의 광산노조의 다이는 이 단체(?)의
정체를 모른 채 후원을 받아들이게 되고, 나중에는 진정한 결속과 연대의 악수를 청한다(아래).
 


 
처음부터 아름다운 연대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박상륭 작가의 말마따나 아름다움은 앓은 다음에야 얻어지는 가치다. 그러니까 연대는 완전무결한 결합이라기보다 상처투성이의 연결에 가깝다. 이어붙이기도 힘들고, 지속되는 동안 계속 덜커덕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덕목이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단일한 조직의 부속으로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당신은 자조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조직 운영을 위한 조그마한 톱니바퀴에 불과하다고, 그냥 이대로 소모되다가 끝나버리고 말 거라고. 그래서 더욱 더는 그렇게 살지 않지 않겠다는 자각과 다짐이 절실히 필요하다. 우리 각자는 고유성을 가진 서로 다른 집합이다. 공동체라는 전체집합은 이런 단독적인 우리의 구성체다.
 

파업이 있고 나서 몇 년 후, 마가렛 대처는 “‘사회공동체’와 같은 것은 없다. 오직 개인으로서의 남성과 개인으로서의 여성,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런던 프라이드>의 주요 캐릭터들은 대처가 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가치, ‘단결의 힘’을 열렬히 믿는다. 이러한 가치가 오늘날 다소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현재 우리는 이기심에 이끌려 인생 역전의 한 방을 얻으려고 하는 다수의 개인들이 되지 않았나. “당신이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이 아니라, ‘당신’만.”
 

매튜 워처스 감독이 밝힌 연출의 변이다. 여기에서 마가렛 대처가 역설하는 개인은 주체적 존재가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개인은 조직에 충성하는 신민일 따름이다. 그런 사고관에서 사회 공동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매튜 워처스 감독은 마가렛 대처가 염두에 둔 개인을 문제 삼는다. 조직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혼자만 편히 살아보겠다는 이기적 유전자가 조종하는 인형들. 연대는 이들을 함께 사는 것의 소중함을 아는 자발적 행위자로 바꾸는 힘이다. 물론 줄곧 썼듯이, 그러려면 지극히 험난한 여정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런던 프라이드>에서 자세히 그려진다. 다이를 비롯한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웨일스 광부 노조는 LGSM의 도움과 교류를 꺼린다.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 탓이다.

부정적으로 치우친 생각의 균형 잡기를 위한 시도는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부터 시작된다. LGSM 멤버 중 한 사람인 마크(벤 슈네처)의 솔직한 발언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듯하다. 그는 웨일스 탄광 마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을 돕고 싶어서 모금을 시작했고 다른 뜻은 없습니다. 우리도 당신들이 현재 겪고 있는 일―멸시와 억압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었다고 사람들의 태도가 단번에 달라질 리 없다. 다만 이 말이 얼음장 같았던 그들의 마음에 작은 균열을 낸 것만은 틀림없다. 급작스러워 보이는 전환, 그 아래에는 변화를 모색했던 무수한 실패가 쌓여 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해볼 수 있고, 오늘과 다른 미래를 예감할 수 있는 것이다.

LGSM을 망라한 여러 사람의 노력은 쓸모없지 않았다. 영화의 결말에도 나온다. 이들은 실천적 연대를 보여줬다. 아니 성공하지 못했다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했을 테니까. 그것은 결코 무용한 몸부림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이질적인 것 자체가 부분집합으로 모인, (공집합을 포함하는) 전체집합’으로서의 공동체가 도래하는 것이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다 같이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에서,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인간다운 삶을 위협하는 권력에 다 같이 맞서는 장면에서, 나는 살아야 할 공동체는 어떤 것이며, 상상해야 할 공동체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우리는 긍지를 잃는다. '프라이드(pride)'는 영화의 원제목이기도 하다. 




 
여러분을 돕고 싶어서 모금을 시작했고 다른 뜻은 없습니다. 우리도 당신들이 현재 겪고 있는 일―멸시와 억압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게이 마크의 말은 연대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질적인 것들이 모인 전체집합으로서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이 아닐까.
▲ “여러분을 돕고 싶어서 모금을 시작했고 다른 뜻은 없습니다.
우리도 당신들이 현재 겪고 있는 일―멸시와 억압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게이 마크의 말은 연대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질적인 것들이 모인 전체집합으로서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이 아닐까.
 
 
 
 
 

 
 

_허희(문학평론가, 영화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에서 발행하는 서울시 마을공동체 온라인 뉴스레터 <서울마을이야기> vol.52호(2017.5.31.) 기사입니다. 퍼가실 때는 출처를 명확하게 밝혀주시고, 전문 기사에 대한 링크를 걸어주세요. (단, 영리 목적에 의한 퍼가기는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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